40년 전 베네치아와 무라노 섬에서 서약한 부부가, 결혼 40주년에 무라노 핸드메이드 유리화병으로 사랑을 다시 확인한다. 귀국 후 루미스페이스 조명 좌대 제작으로 유리의 영롱함을 ‘집 안의 무라노’로 완성했다.
결혼 30주년 아침,
아내는 주전자에서 김이 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식탁을 닦았다. 남편은 평소처럼 신문을 펼쳤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느렸다.
“오늘 뭐 있어요?” 아내가 물었을 때 남편은 웃기만 했다.
웃음이 조금 떨렸다.
오래 살면 사람의 떨림을 먼저 알아차린다.
그들은 1996년 봄에 결혼했다.
서울 변두리 신혼집, 좁은 부엌, 세탁기 한 대가 전부였던 시절.
그래도 두 사람은 여행을 좋아했다.
신혼 1년 차, 남편이 어렵게 모은 돈으로 이태리 여행을 갔다.
패키지가 아니라 배낭이었다. 베네치아에 도착했을 때, 길은 물로 나뉘어 있었고, 안내 표지판은 낯설었다.
길을 잃고도 이상하게 불안하지 않았다.
물 위로 떠 있는 도시가 그들을 대신 안내하는 것 같았다.
카날레 그란데 근처에서 남편은 아내의 손을 잡고 “우리 늙어서도 여기 다시 오자”라고 말했다.
아내는 그 말이 장난 같아서 웃었지만, 그날 저녁, 작은 카페에서 우연히 같은 테이블을 쓰게 된 노부부가 두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조용해졌다.
미래가 갑자기 가까워졌다.
다음 날 그들은 무라노 섬으로 건너갔다.
배는 짧은 시간에 섬을 닿았고, 공방 거리에는 유리 냄새와 불의 열기가 섞여 있었다.
유리공예 시연을 보던 아내는 숨을 멈췄다.
붉게 달아오른 유리가 공예작가의 호흡과 손끝에 따라 길어지고, 접히고, 다시 둥글어졌다.
핸드메이드라는 단어가 그때는 아직 흔하지 않았지만, 아내는 ‘사람이 만든 흔적’이 얼마나 따뜻한지 처음 알았다.
남편은 공방 한쪽에서 작은 유리 조각을 들고 오래 망설였다.
아내는 그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몰랐다.
그날 오후, 섬 끝의 조용한 다리에서 남편이 말했다.
“지금은 반지가 없지만, 이것이 결혼 반지야.”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소리가 서약서처럼 들렸다.
그들은 한국으로 돌아가 현실을 시작했고, 서약은 말이 아니라 생활이 되었다.
29년이 흐르는 동안 남편은 매년 선물을 했다.
꽃다발, 손편지, 주말 여행, 때로는 그냥 설거지를 대신하는 하루. 아내는 그 꾸준함이 더 큰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30주년을 앞두고 남편에게 이태리 비즈니스 출장이 잡혔다.
아내는 “일이 먼저지”라고 말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쓸쓸했다.
남편은 해외출장 일정 사이에 이틀을 떼여서 베네치아로 갔다.
오래된 약속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무라노 섬 공방 골목을 다시 걸었다.
젊었을 때는 몰랐던 것들이 보였다.
유리 가루가 쌓인 바닥, 작업대의 흠집, 불꽃의 소리, 그리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태양의 햇살.
그 빛이 유리 표면에 닿자 반사되는 영롱함이 천장과 벽을 흔들듯 퍼졌다.
남편은 그 순간, 아내가 왜 그날 숨을 멈췄는지 이해했다.
공방 진열대에서 그는 한 점의 유리화병을 발견했다.
얇은 곡선이 물결처럼 이어지고, 내부에는 미세한 기포가 별자리처럼 박혀 있었다.
작가는 “같은 모양은 다시 못 만들어요”라고 말했다.
남편은 즉시 구매했고, 파손 방지를 위해 맞춤 포장을 요청했다.
목재 상자, 완충재, 습도 방지 실리카겔, ‘FRAGILE’ 스티커.
그는 서류에 서명하며 마음속으로 또 한 번 서약했다.
화병을 들고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긴장됐다.
베네치아 마르코 폴로 공항 보안 검색대에서 직원이 상자를 열어보자고 했고, 남편은 속으로 ‘제발 조심히’라고 중얼거렸다.
투명한 유리가 형광등 아래에서 한 번 더 빛났고, 직원은 “벨리시모”라고 말하며 다시 포장해 주었다.
한국 입국 후에는 세관 신고서에 공예품이라고 적고, 파손 보험을 추가로 들었다.
택시 뒷좌석에서 그는 상자를 무릎에 올린 채, 급브레이크가 걸릴 때마다 몸으로 충격을 막았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화병을 바로 꺼내지 않았다.
아내가 모르는 곳, 장롱 위쪽에 잠시 숨겨 두고, 먼저 사전에 인터넷으로 검색한 루미스페이스와 미팅 날짜를 잡았다.
온라인 화상회의에서 엔지니어는 “유리는 빛의 각도에 민감합니다.
설치 공간의 벽 색과 창 방향도 중요해요”라고 말했다.
남편은 거실 창이 남서향이고, 오후 빛이 들어온다는 점을 설명했다.
아내가 저녁마다 TV를 보는 자리, 청소 동선, 콘센트 위치까지 적어 보냈다.
“무라노 유리화병의 아름다움을 증폭시키고 싶습니다. 조명 좌대 제작 의뢰가 가능할까요?”
담당자는 화병의 높이, 바닥 지름, 유리의 투명도, 설치 위치의 조도까지 물었다.
남편은 사진과 치수를 보내며 진지하게 답했다.
루미스페이스는 낮은 열, 높은 연색성, 눈부심 억제를 조건으로 설계를 제안했다.
빛이 유리의 곡선을 따라 흐르도록 확산판 각도를 조정하고, 위로 튀는 광을 줄이기 위해 확산소재를 넣었다.
전원은 안정적인 밧데리와 디밍 스위치를 포함했고, 좌대 표면은 무광 블랙으로 마감해 반사를 제어했다.
남편은 도면을 보고 “이건 받침이 아니라 무대네요”라고 말했다.
기념일 저녁, 남편은 조명좌대 위에 화병을 올리고 스위치를 켰다.
집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빛이 유리 내부로 스며들어 기포를 하나씩 깨우고, 곡선의 가장자리에서 얇은 금빛 선을 만들었다.
아내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여기… 무라노 같아.”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30년 전에 했던 말, 지키러 갔다 왔어.” 아내는 화병을 오래 바라보다가 남편의 손을 다시 잡았다.
물이 아닌 마룻바닥 위에서도, 서약은 여전히 반짝였다.
그날 밤 딸이 케이크를 들고 찾아왔고, 셋은 미역국과 파스타를 함께 먹었다.
아내는 조명좌대 옆면에 새겨진 작은 문구를 발견했다.
‘Murano 1996, Seoul 2026’. 남편이 몰래 적어 넣어 달라고 부탁했단다.
아내는 웃다가, 결국 조용히 울었다.
그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우리 약속은 유리처럼 깨지지 않게, 빛으로 지키자.
그리고 지금처럼 내일도, 모레도, 매년 계속 너를 선택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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