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향사가 요청한 맞춤형 향수 전시대 3종을 ‘외로울 때·비 올 때·포기할 때’ 감정 테마로 설계하고, 밑에서 비추는 조명과 색온도·밝기 조절로 분위기를 완성한 사례
비가 오기 직전의 공기는 언제나 조금 비어 있었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물방울이 숨을 고르는 사이, 사람은 괜히 마음부터 젖는다.
그녀는 그 틈을 맡았다.
조향사라는 직업은 향을 만드는 일이지만, 사실은 감정을 보관하는 일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노트를 펼쳤다. 첫 줄에 적힌 건 “향수 전시대.” 그 다음 줄에는 “빛.” 그리고 마지막 줄에는, 사람에게는 잘 말하지 않는 세 개의 문장이 있었다.
그녀는 루미스페이스에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두 번 울리고, 안정적인 목소리가 받았다.
“안녕하세요. 루미스페이스입니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저… 향수가 아니라 감정을 전시하고 싶어요.”
상대는 놀라지 않았다. 대신 기술자다운 질문이 먼저 나왔다.
“향수 병은 어떤 재질인가요? 유리 두께는요? 전시대 크기와 수량, 설치 환경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가 작게 웃었다. “역시… ”
그러고는 한 번에 말해버렸다.
“맞춤형 전시대 3종이 필요해요. 빛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게요. 색온도는 각 분위기에 맞게. 그리고 중요한 건—열이 전도되면 안 돼요. 향이 변하니까요. 밝기도 조절돼야 하고요.”
전화기 너머로, 잠깐의 정적이 지나갔다.
그 정적은 난감함이 아니라 계산 같았다. 머릿속에서 설계도가 펼쳐지는 소리였다.
“가능합니다.”
루미스페이스는 단정하게 말했다.
“향을 블렌딩하듯, 빛도 레시피로 만들면 돼요. 색온도, 확산, 각도, 눈부심까지요.”
그녀는 외로움을 “따뜻함”으로 착각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노랗게 켜면 외로움이 위로가 아니라 합리화가 되어버리니까. 루미스페이스는 낮은 톤을 잡되, 지나치게 끈적하지 않게 균형을 맞췄다. LED 점이 병을 찌르지 않도록, 빛이 면으로 퍼지게 만들었다.
빛이 병 밑바닥에서 조용히 올라와 라벨 글자를 살리는 순간,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한참을 보았다.
“이건… 말 걸지 않는 위로네요.”
비의 향은 촉촉함이지만, 빛이 촉촉하긴 어렵다.
유리병은 빛을 너무 솔직하게 반사했다. 잘못하면 반짝임이 비를 죽인다.
루미스페이스는 각도를 낮추고 눈부심을 줄였다.
반짝이기보다 머무는 빛. 물방울이 유리창에 붙었다가 천천히 미끄러지는 느낌처럼, 빛이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게 했다.
테스트 점등을 보던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비가 오면 사람은 향을 더 믿게 돼요. 기억이 젖어서.”
그녀는 ‘포기’를 어둠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포기는 실패만이 아니라, 어떤 것을 놓아주고 살아남는 방식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그녀는 부탁했다.
“꺼지는 조명이 아니라… 놓아주는 조명이었으면 좋겠어요.”
루미스페이스는 단순히 밝기를 낮추는 스위치를 만들지 않았다.
밝기가 내려가는 “속도”를 설계했다.
한 번에 툭 꺼지지 않고, 감정이 바닥에 부딪히지 않게 천천히 감속하는 디밍 커브. 꺼짐이 아니라 정리되는 빛이었다.
그녀는 그 빛 앞에서 오래 멈췄다.
그리고 마침내 말했다. “포기에도 우아함이 있네요.”
한 달 뒤, 그녀는 세 전시대에 이름을 붙였다.
외로울 때의 향수 전시대는 "Solitude Base".
비가 올 때의 향수 전시대는 "Rain Memory".
포기할 때의 향수 전시대는 "Release Glow".
마지막으로 루미스페이스에 전화를 걸었다.
납품 다음날이었다.
작업실 창밖에 비가 올 듯 말 듯한 하늘이 걸려 있었다.
“루미스페이스는 조명을 만든 게 아니라…” 그녀가 말했다.
“제가 만든 향의 감정에 무대를 만들어줬어요.”
상대는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향이 주인공이면, 빛은 관객의 눈을 조용히 안내하죠.”
통화를 끊고 그녀는 전시대를 바라봤다.
향수병들이 아직 아무에게도 뿌려지지 않은 채 빛을 받았다.
그 빛은 뜨겁지 않았고, 과하지도 않았다.
다만 아래에서 위로, 향이 올라갈 길을 열어주는 빛이었다.
비가 첫 방울 떨어지기 전의 공기처럼.
사람이 포기하기 직전의 마음처럼.
그리고 외로움이 위로로 바뀌기 바로 직전처럼.
그녀는 조용히 손잡이를 돌려, 밝기를 한 단계 낮췄다.
빛이 내려가며 말해주는 것 같았다.
“괜찮아. 너는 지금, 다음 향을 만들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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