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이 보이는 선반과 제품이 좋아 보이는 선반은 다릅니다. 루미스페이스 도광판 선반은 화장품 브랜드 연출에 필요한 균일도·연색성·광확산 설계를 중심으로 제작됩니다.
도면에 적힌 이름, 현장에 없던 빛
전화는 오전 10시 17분에 울렸다.
그날 나는 사무실 한쪽에서 도광판 샘플의 광확산 상태를 보고 있었다. 같은 LED를 쓰더라도 패턴 밀도와 아크릴 상태, 반사면 마감에 따라 빛은 전혀 다른 표정을 짓는다. 우리는 그걸 매일 본다.
그래서인지, 내 눈은 빛의 작은 거짓말도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루미스페이스입니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어딘가 단단하게 눌려 있었다. 감정을 눌러 담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최근에 사내 인테리어를 마쳤는데요… 혹시 어떤 인테리어 회사가 귀사 제품, 그러니까 도광판 선반을 구매한 이력이 있는지 확인 가능할까요?”
나는 샘플 위에 올려둔 손을 멈췄다.
이 질문은 그냥 나오는 질문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이 일을 오래 해오면서 배운 바로는 그렇다.
보통 이런 흐름이다.
도면에는 우리 제품이 명시돼 있다. 발주처는 당연히 그걸 믿고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런데 시공 단계에서 누군가 “비슷한 것”으로 바꾼다. 설치는 끝난다.
처음엔 다들 넘어간다. 그런데 이상하게 결과물이 기대한 만큼 안 나온다. 사진이 안 받는다.
제품이 안 살아난다. 공간 분위기가 어긋난다. 그제야 발주처가 추적에 들어간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회사명이나 현장명, 시기 말씀해주시면 내부 이력 먼저 확인해보겠습니다.”
상대는 화장품 회사 홍보팀 실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회사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관련 업종의 조명 포인트를 자동으로 떠올렸다.
화장품 진열 선반은 단순히 밝기만 확보한다고 끝나는 제품이 아니다.
색온도, 연색성, 광 균일도, 반사 제어, 패키지 소재 반응까지 전부 결과물에 영향을 준다. 특히 립, 앰플, 쿠션 같은 제품군은 빛이 조금만 잘못돼도 ‘비싸 보이던’ 제품이 갑자기 차갑고 건조하게 보인다.
실장은 잠깐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저희가 도면에는 분명히 루미스페이스 제품으로 명기했거든요. 그런데… 완공 후 결과가 너무 달라서요.”
그 “너무 달라서요”라는 한마디 안에, 나는 이미 절반의 현장을 본 셈이었다.
나는 내부 거래 시스템을 열었다.
납품 이력, 거래처명, 시기, 유사 프로젝트까지 빠르게 조회했다.
회사명으로 검색하고, 추정 시공사명으로도 검색 해봤다.
혹시라도 중간 유통으로 빠졌을 가능성을 생각해 몇 가지 변형명도 넣어봤다. 그래도 결과는 같았다.
없다.
해당 현장 관련 구매 이력이 없었다.
나는 잠시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가능한 한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확인 결과, 말씀하신 현장 관련해서는 저희 정식 구매 이력이 없습니다.”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아주 짧은 정적이었지만, 내겐 길게 느껴졌다. 누구나 그렇다. 의심이 사실로 바뀌는 순간에는 말보다 침묵이 먼저 나온다.
실장이 낮게 물었다.
“…그럼 저희가 받은 선반은 루미스페이스 제품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정확한 판단은 현장 사진, 사양 확인이 필요합니다. 다만 말씀하신 현장으로는 저희가 납품한 기록이 없습니다. 정식 공급은 아니라고 보셔야 합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참으려 했지만 새어나온 숨이었다.
“알겠습니다. 사실… 저희 대표님이 오늘 아침에 홍보팀을 불렀어요.”
그다음 이야기는 마치 이미 예상한 영화를 다시 보는 것 같았다.
완공 후 사내 홍보 촬영을 했는데, 결과가 이상했다는 것이다.
화장품 패키지의 컬러가 탁하게 죽고, 유리병 제품은 깊이감 없이 밋밋하게 보였다.
어떤 선반 칸은 가운데만 밝고 가장자리는 살짝 꺼져 있었고, 어떤 칸은 빛이 고르게 퍼지지 않아 제품 뒤쪽에 미세한 그림자 띠가 생겼다. 전체 공간은 새로 인테리어를 했는데도 고급스럽다기보다 차갑고 피곤한 느낌이 돌았다고 했다.
나는 그 설명을 들으며 눈앞에 장면이 그려졌다.
핫스팟이 살아 있고, 광확산이 부족하며, LED 라인의 존재감이 은근히 남아 있는 상태.
“불이 들어오는 선반”은 맞지만, “브랜드를 살리는 선반”은 아닌 상태.
실장은 억울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분명히 도면에 루미스페이스로 명기했고, 내부에서도 그 기준으로 설명했거든요. 그런데 현장에서는 비슷한 제품이라고 해서 진행됐나 봐요. 저는… 진짜 루미스페이스가 들어간 줄 알았어요.”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화가 나기보다 씁쓸해진다.
우리 제품이 생존하는 이유는 화려한 포장 때문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차이를 끝까지 맞추는 시간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늘 그 시간을 생략한 채, 이름만 비슷하게 가져간다.
“실장님, 가능하시면 현장 사진 몇 장 보내주세요. 그리고 촬영하신 컷도 있으면 좋습니다. 저희가 조명 관점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어느 정도 진단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날 오후, 사진이 도착했다.
사진을 열어보자마자 나는 확신했다.
이건 단순히 ‘취향 차이’가 아니었다.
첫 번째 사진은 립 제품 라인이었다.
패키지 상단의 미세한 광택이 살아야 하는데, 조명이 면으로 퍼지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끊겨 보여 제품 표면이 고르게 빛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스킨케어 라인 진열 컷이었는데, 투명 용기 뒤쪽에서 빛이 깨끗하게 받쳐주지 못해 내용물의 맑은 느낌이 사라져 있었다. 세 번째는 전체 공간컷. 선반마다 밝기 톤이 미묘하게 달라 벽면이 하나의 브랜드월처럼 보이지 않고, 각기 다른 조명이 섞인 전시장처럼 느껴졌다.
나는 사진을 확대해서 보다가, 같이 있던 기술팀 직원에게 화면을 돌렸다.
“봐봐. 이 칸은 중앙부만 밀리고 모서리 죽지? 패턴 설계가 얕거나 광원 배치가 안 맞은 거야. 그리고 여기… LED 라인 비침 거의 올라왔어.”
기술팀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색도 너무 차갑네요. 화장품엔 좀 독하네.”
“맞아. 밝기 숫자만 보면 세다고 좋아할 줄 아는 현장들이 있어. 근데 화장품은 밝기보다 발색이 먼저야.”
나는 실장에게 회신 전화를 했다.
그리고 최대한 조심스럽지만 명확하게 설명했다.
“사진상으로 볼 때, 현재 선반은 제품을 ‘보이게’는 하지만 브랜드를 ‘좋아 보이게’ 만들지는 못하는 상태로 보입니다. 특히 화장품은 색감과 재질 표현이 중요해서 광 균일도, 색온도, 연색성이 맞아야 합니다. 단순 대체품으로는 결과 차이가 꽤 크게 납니다.”
그날 저녁, 실장은 다시 연락해 왔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이번엔 결심이 담겨 있었다.
“대표님이 인테리어 시공 사장에게 구매 증빙을 요청했어요. 처음엔 동급 제품이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기능상 문제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대표님이… ‘우리 브랜드는 기능만 보는 회사가 아니다’라고 하셨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웃었다.
화장품 회사의 대표는 적어도 본질을 알고 있었다.
다음 날, 실장은 더 구체적인 얘기를 들려줬다.
대표가 회의실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조명이 들어오는 선반이면 다 같은 선반이 아닙니다. 우리 제품은 빛에서 싸구려처럼 보이면 안 돼요.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도면 기준을 임의로 바꾼 거예요. 그건 품질 문제가 아니라 신뢰 문제입니다.”
나는 그 문장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결국 현장은 항상 거기서 갈린다.
품질은 눈으로 보이고, 신뢰는 시간이 지나서 드러난다.
하지만 한번 깨지면 신뢰 쪽이 더 비싸다.
며칠 뒤, 예상대로 결과가 나왔다.
기존 인테리어 업자는 곤혹스러운 위치에 몰렸다. 싼 가격으로 마진을 지키려던 선택이 재시공 리스크로 돌아왔고, 무엇보다 발주처와의 신용을 잃었다.
실장은 담담하게 말했다.
“대표님이 다른 인테리어 회사로 교체 지시하셨어요. 이번엔 루미스페이스 제품으로 실제 발주하고, 납품 이력까지 확인하는 조건으로요.”
나는 전화를 끊고 팀 회의를 열었다.
사실 이런 순간에는 이상한 감정이 동시에 올라온다.
한편으론 ‘결국 다시 돌아왔구나’ 하는 안도감.
다른 한편으론 ‘처음부터 제대로 갔으면 저 사람들도 안 힘들었을 텐데’ 하는 피로감.
그래도 현장은 감정으로 복구하지 않는다.
데이터와 손으로 복구한다.
새로 투입된 인테리어 회사 담당자가 우리 사무실로 왔을 때, 첫마디부터 달랐다.
“이번엔 우회 없이 가겠습니다. 화장품 진열용 선반은 품질 중심으로 맞춰야 합니다. 현장 사진, 마감재 정보, 제품군 리스트 다 준비해왔어요.”
나는 자료를 받아들며 속으로 말했다.
이제야 대화가 된다.
우리는 먼저 진단부터 했다.
선반 형태만 보는 게 아니라, 실제 진열될 제품군을 분류했다.
립/쿠션/앰플/스킨/크림 용기의 재질 반응이 다르고, 라벨 인쇄 색도 다르다.
벽체 마감이 무광인지 반광인지, 주변 천장 조명이 4000K인지 5000K인지에 따라서도 선반의 체감색은 달라진다.
촬영팀이 주로 쓰는 카메라 세팅까지 물었다. 현장 담당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기까지 보세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는 선반을 만드는 게 아니라, 선반 위에 놓일 제품의 인상을 만듭니다.”
그 말은 멋있어 보이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우리 회사에서는 당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개선 포인트를 정리했다.
핫스팟 억제, 광원 배치 최적화, 확산 설계 보정, 선반별 광 편차 최소화, 색감 조정, 안정적인 드라이버 적용. 화려한 옵션을 붙이는 것보다 ‘애매한 실패’를 없애는 데 집중했다.
화장품 공간에서는 과한 조명도 실패다.
제품을 돋보이게 해야지, 조명이 자기 존재를 뽐내면 안 된다.
제작 기간은 촉박했다.
이미 화장품 회사 내부 재점검 일정이 잡혀 있었고, 홍보팀은 재촬영 스케줄을 다시 조정 중이었다.
우리는 일정표를 펼쳐놓고 말했다.
“루미스페이스 회사는 제작과 점등 테스트 책임집니다. 현장팀은 철거 및 전기 정리, 재설치 동선 확보. 홍보팀은 제품 재배치 기준. 대표실은 최종 검수 포인트 확정. 이건 단순 교체가 아니라 복구 프로젝트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실 공기는 긴장되어 있었지만, 적어도 이번엔 방향이 하나였다.
철거 당일, 나는 현장에 나갔다.
기존 선반이 하나씩 내려오는 걸 보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다.
불도 들어왔다. 그런데 그 앞에 서 있으면 알 수 있었다.
빛이 공간을 하나로 묶지 못하고, 칸마다 따로 놀았다.
제품이 놓인 자리마다 “나 좀 봐줘”가 아니라 “여기 불 들어와요” 정도의 말만 하고 있었다.
현장 직원 한 명이 중얼거렸다.
“처음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왜 어색했는지 알겠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명은 처음엔 다 비슷해 보여요. 근데 오래 보면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오후 늦게, 새 조명선반 설치가 시작됐다.
전원 연결 전 마지막 점검을 하며 나는 늘 하던 습관대로 손으로 선반 표면을 쓸었다.
마감, 간격, 체결, 배선 정리. 현장에서는 작은 대충이 나중에 가장 크게 들킨다.
“점등 들어갑니다.”
스위치가 올라가고, 선반에 빛이 찼다.
나는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현장 공기가 진짜로 달라졌다.
제품 라벨이 또렷해지고, 유리 용기의 깊이감이 살아났다. 선반마다 따로 놀던 빛이 하나의 리듬처럼 정리됐다.
벽면 전체가 한 장의 브랜드 화면처럼 보였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전체를 보기 시작했다.
좋은 빛이 들어오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거리를 조절한다. 가까이서 결을 보고, 멀리서 인상을 확인한다.
홍보팀 실장이 조용히 말했다.
“…맞아요. 우리가 처음 원한 게 이거였어요.”
그 목소리에는 안도와 미안함, 그리고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
자신이 틀린 게 아니라는 안도.
처음에 끝까지 확인하지 못한 미안함.
쓸데없이 돌아온 시간에 대한 분노.
잠시 후, 화장품 회사 대표가 내려왔다.
사진으로만 보던 사람이었는데 생각보다 말수가 적었다.
그는 선반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제품 몇 개를 직접 위치 바꿔가며 반사와 그림자를 확인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짜 검수는 설명으로 하는 게 아니다. 보는 사람이 스스로 납득하게 만들어야 한다.
몇 분 뒤, 대표가 실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좋아요. 이번엔 제품이 아니라 브랜드가 진열되어 있네요.”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몸 안쪽에 박혀 있던 긴장이 조금 풀리는 걸 느꼈다.
우리는 결국 그 한마디를 위해 며칠을 달린 셈이었다.
현장 정리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나는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이 일은 결국 ‘조명선반 교체’로 기록될 것이다.
발주처 문서에는 아마 재시공, 품질 보완, 납품 완료 같은 단어로 남겠지. 하지만 내가 본 건 그보다 조금 더 깊은 사건이었다.
도면에 이름을 쓰는 이유는 장식이 아니다.
그 이름에 기대되는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걸 단가표만 본다.
하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안다.
빛의 균일도 10% 차이가 사진 한 장의 인상을 바꾸고,
색감의 미세한 오차가 제품의 신뢰도를 흔들며,
도면 기준을 임의로 바꾼 선택 하나가 거래 전체의 신용을 무너뜨린다는 걸.
우리는 도광판 선반을 만든다.
하지만 가끔은 선반보다 더 큰 걸 복구한다.
브랜드의 표정, 실무자의 명예, 그리고 현장이 다시 서로를 믿을 수 있게 되는 감각.
사무실로 돌아와 마지막 정리하던 밤, 나는 그날 첫 통화를 떠올렸다.
“혹시 어떤 인테리어 회사가 귀사 제품을 구매한 이력이 있는지…”
그 조심스러운 질문 하나가 결국 이렇게 큰 이야기가 되었다.
나는 모니터를 끄기 전에 메모장에 짧게 적어두었다.
이름만 같은 조명은 많다.
하지만 브랜드를 살리는 빛은, 끝까지 맞춘 사람의 손에서 나온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또 다른 현장의 샘플 불을 켰다.
늘 그렇듯, 빛은 먼저 말이 없고,
결과가 나온 뒤에야 사람들 입을 통해 진실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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