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쯤, 책상 위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백화점 ○○층 매니저".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번호라 잠깐 당황했지만, 전화를 받자마자 상황이 이해됐다.
"○○님, 혹시 전에 팝업스토어 대기 리스트 올려놓으셨던 거 기억나세요? 벽면 코너 자리가 갑자기 비었는데, 한 달 정도 입점하실 생각 있으신가요?"
목소리에서 살짝 급한 기색이 묻어났다.
아마 다른 업체가 빠지면서 생긴 빈자리를 채우려는 모양이었다.
"벽면 코너요?"
나는 잠깐 뜸을 들였다. 솔깃한 제안이긴 했지만, 머릿속에 4년 전 팝업스토어의 악몽이 떠올랐다.
그때는 급하게 들어갔다가 인테리어 비용만 왕창 써버리고, 매출은 기대 이하였던 터라 결국 적자만 남았다.
"또 잘못 꼈다가는 진짜 망신살인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망설였다.
그래도 이번엔 ‘벽면 코너’라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과는 뭔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날 오후 일찍 퇴근하여 직원과 백화점으로 향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도착해보니 매니저가 말한 대로 벽면 코너 자리였다. 천장이 높고, 넓은 벽이 딱 눈에 띄었다.
특히 모서리 벽면 코너 이기 때문에 백화점 특성상 타 매장 비해 인테리어 가벽 높이 제한 없음이라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이 벽을 잘 활용하면 예전처럼 망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
벽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텅 빈 벽면이 나한테 뭔가를 해보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야 떠오른 이름,
"루미스페이스".
예전에 조명 관련 프로젝트에서 협업했던 업체였다.
맞춤형 라이트패널로 유명했고, 당시 결과물도 좋은 편이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 오랜만입니다! 또 뭔가 재밌는 거 하시게요?"
루미스페이스 팀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쾌활했다.
"네, 백화점에서 한 달짜리 팝업 제안 들어왔어요. 벽면 코너인데, 빠르게 설치하고 철거할 수 있는 벽면 배치할 라이트패널 대여 가능할까요?"
"벽면이요? 그럼 모듈형 패널로 하면 될 것 같아요.
심야 작업도 문제없고, 비용도 적당히 맞춰드릴게요."
통화는 10분도 안 걸렸다.
대충 방향이 잡혔다.
벽면에 집중 투자하고, 나머지 공간은 기존 재고로 채우는 식으로 예산을 줄이기로 했다.
4년 전처럼 쓸데없이 욕심 부리다 망할 순 없었다.
다음 날, 백화점 매니저와 통화로 입점 계약 의사를 알렸다.
오픈까지 남은 시간은 딱 12일.
"시간 빠듯하네. 돈도 별로 없고…"
속으로 투덜대며 창고에 쌓인 매대를 꺼냈다.
상태가 나쁘지 않아 간단한 칼라 시트지 수리로 재활용 가능했다.
그리고 루미스페이스에는 브랜드 컬러를 살린 간단한 조명 디자인을 부탁했다. 화려할 필요는 없었다.
제품이 돋보이기만 하면 됐다.
설치 당일, 백화점 영업이 끝나는 오후 8시 30분.
문이 닫히자 루미스페이스 팀이 트럭을 대고 화물 엘리베이터로 도착을 했다.
루미스페이스 팀장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대기하고 있는 시공팀에게 지시를 했다.
"오늘 밤 안에 끝내야 합니다. 4시간 목표로, 각자 맡은 대로 움직여요!"
작업은 체계적이었다. 시공 조립팀, 전기팀,
벽면에 라이트패널을 조립하고, LED를 연결했다.
전선은 깔끔하게 정리됐다. 그리고 백화점 시설 관리자가 선호하는 방수형 아답터도 신규로 설치했다.
나는 옆에서 작업 인원에게 아이스 커피를 제공하면서 불안한 눈으로 지켜봤다.
밤 12시 20분, 팀장이 스위치를 올렸다.
"점등 테스트 갑니다."
어두웠던 백화점 공간 코너에 빛이 퍼졌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확실히 눈길을 끄는 벽면 인테리어 조명이었다.
"이 정도면… 됐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날 아침, 오픈 전 마지막 점검을 했다.
벽면 라이트패널 빛이 제품을 부드럽게 감싸며 분위기를 살려줬다.
재활용 매대도 어색하지 않게 녹아들었다.
다음날 오전 11시, 첫 손님이 다가왔다.
30대쯤 된 여성이었다.
"여기 새로 생긴 데인가요? 분위기 좋네요."
벽 앞에서 사진을 찍더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곧 인스타그램에 올라간 게시물이 보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SNS에서 반응이 터졌다.
"○○백화점 팝업스토어 벽면 조명 예술이네."
"심플한데 세련됨. 어디 업체지?"
댓글은 대부분 긍정적이었다.
백화점에서 지나가는 손님도 점점 늘었다.
첫 주 데이터가 나왔다.
기존에 입점한 업체보다 방문객이 2배 가까이 많았고, 매출은 목표의 70%를 2주 만에 찍었다.
인테리어 비용을 줄인 덕에 이익률도 괜찮았다.
팝업 종료 일주일 전, 매니저에게 전화가 왔다.
"○○님, 이번 팝업 반응이 좋아서요. 다음에 자리 나면 먼저 연락드릴까요?"
"하하, 그럼요. 또 밤새 작업 준비해야죠."
전화를 끊으며 씩 웃었다.
한 달 뒤, 팝업이 끝났다.
마지막 날 저녁 철수전 루미스페이스 시공팀과 회사 팀원들과 벽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루미스페이스 라이트패널은 철거됐지만, 그 빛이 남긴 여운은 계속됐다.
이번 경험에서 얻은 건 단순했다.
"ROTC 소령 때 작전과에서 딱 하나 배웠어. 벽을 등지면 절대 안 무너진다는 거. 이번도 똑같았지. 벽을 뒤에 두고 빛으로 적을 몰았어. 자원은 부족했지만 결과는 확실했어 그리고 적게 쓰고, 핵심만 살리자."
그 뒤로도 이 공식은 다른 프로젝트에서 통했다.
조명으로 오랜 20년의 업력을 가진 루미스페이스 회사와 비즈니스 관계 그리고 서로 존중하면서 소통한 경험은, 돈도 시간도 부족했던 나에게는 꼭 필요한 협력 회사였다.
루미스페이스 회사의 대표와 소통하면서 느낀 문장 "빛 하나로도 충분히 싸울 수 있다는 걸", 드디어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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